2019년 내셔널리그 페넌트레이스에서 가장 뛰어난 투구를 펼친 두 투수는 제이콥 디그롬과 류현진이다. 미국 언론들은 디그롬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최고투수상인 사이영상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디그롬은 올해 11승 8패, 평균자책점 2.43을 기록했다. 다승과 평균자책점에서 류현진에 밀리지만, 투구 이닝수가 204이닝으로 류현진(182.2이닝)보다 21.1이닝 더 많았다.
선발투수의 역할은 실점을 최소화하고 긴 이닝을 던지면서 팀의 승리 확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200이닝 넘게 던진 디그롬의 철완 능력은 평가해 줄 수 밖에 없다.
디그롬이 류현진보다 3차례 더 선발로 나와 더 긴 이닝을 던진 점, 레이스 막판에 보여준 괴력이 안겨준 시각 효과 등으로 사이영상 경쟁에서 더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LA 언론이 류현진을 사이영상으로 미는 듯 했지만, 다른 지역 언론에선 디그롬의 수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디그롬의 시즌 마지막은 엄청났다. 디그롬은 마지막 4경기에 28이닝(경기당 7이닝)을 던져 단 1점만 내줬다. 마지막 4경기 평균자책 0.32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이영상은 미국의 야구 전문 기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이미 투표는 끝난 상태(사이영상 투표는 포스트시즌 돌입 전에 마무리된다)이며, 결과는 11월에 공표된다. 포스트시즌 성적이 투표자들의 시각을 왜곡하는 이미지 효과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디그롬의 팀 뉴욕 메츠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미국에선 2000년대 들어 야구 통계도 발전하면서 세밀해졌다. 대체승리기여도(WAR, Wins Above Replacement)를 포함한 다양한 평가지표들이 투수와 타자의 능력을 측정하고 있다. 류현진은 이런 세부적인 지표들에서도 최상위권에 머물다가 하반기 상대적으로
부진을 보이면서 경쟁자들의 추격을 허용했다.
아무튼 '전통 야구'에선 평균자책이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투수의 승수는 타자들이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운'이라는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따라서 현대 야구에선 최고 투수를 뽑을 때 과거 만큼 승수를 중시하지 않는다. 올 시즌 18승으로 내셔널리그 다승 1위를 거머쥔 워싱턴 내셔널스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는 평균자책이 3.32로 10위에 랭크돼 있어 사이영상을 받기 어렵다.
그런데 현대 야구의 투수 평가에 있어선 삼진능력이 과도하게 평가되고 있다. 사실 타자를 유격수 앞 땅볼로 잡으나 삼진으로 잡으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시각적 효과가 지나치게 중시되는 것이다.
디그롬의 삼진 개수는 255개로 류현진(163개)을 압도한다. 미국 야구기자들이 '화장술'(탈삼진 능력)에 가점을 주면 류현진은 사이영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탈삼진 능력은 대부분 평균자책(ERA)에 녹아 있기 때문에 선발투수들의 능력을 비교평가하는 잣대로 삼는 건 부적합한 측면이 크다.
■ 위기를 기회로...더 진화한 류현진
류현진은 전반기(올스타전 이전)까지 109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1.73을 기록했다. 이는 최근 20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낮은 것이었다. 내년 미국 프로야구가 전반기에 발군의 실력을 내는 투수는 류현진의 올해 전반기 실력과 비교될 것이다. 이 정도로 올해 류현진이 보여준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류현진은 큰 고난을 극복하고 진화했다는 점에서 야구사에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류현진은 2015년 어깨 수술로 2015~2016년을 사실상 통째로 쉬었다. 2015년은 전혀 경기에 나오지 않았고 2016년엔 단 1경기(4.2이닝 6자책)만 나와서 호되게 얻어 맞았다.
2017년엔 5승 9패, 평균자책 3.77로 부진했으며, 계속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류현진은 2018년 들어 82.1이닝밖에 던지 못했으나 '건강 회복 신호'를 보여주면서 평균자책 1.97을 기록했다. 당시 LA 다저스의 동료 저스틴 터너는 류현진이 시즌 내내 건강했다면 사이영 후보가 됐을 것이란 말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지난해 이미 '2019년 반란'의 시그널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도 올해와 같은 성적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류현진이 어깨 부상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또 재기를 하더라도 2013~2014년과 같은 정상적인 투구를 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두 시즌인 2013년과 2014년 류현진은 각각 192이닝, 152이닝을 던지면 14승씩을 챙겼다. 평균자책은 3.00, 3.38로 준수했다.
류현진은 4년간의 '전부 혹은 일부 공백' 이후 올해 완전히 부활했다. 그것도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부활했다. 류현진의 부상 극복과 부활 과정은 인간 승리로 평가해도 무난할 것이다.
류현진의 위대한 점은 부상 극복, 그리고 '진화'에 있다. 류현진의 뛰어난 머리나 적응 능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여기에 노력이 보태지면서 류현진은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투수가 됐다.
류현진은 새로운 무기를 장착했다. 류현진 진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는 구종은 커터다. 류현진은 자신의 구종 습득능력을 백분 활용해 타자를 농락할 다양한 구종을 장착한 것이다.
류현진은 포심, 체인지업, 커브에 커트와 투심을 추가하면서 타자들을 현혹시킬 무기를 습득했다. 류현진은 주무기 체인지업에 새로운 구종을 추가하면서 전혀 다른 투수로 변모한 것이다. 특히 올해 6월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필드에서 크게 털린 뒤 같은 장소에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내세워 화끈한 복수전을 펼친 게임은 올해 경기 중 백미였다.
그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를 공부하면서 컨트롤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그 결과 스트라이크존의 상하좌우를 자유자재로 공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류현진은 올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신을 이뤄낸 것이다.
■ '레퍼토리의 제왕' 류현진이 한국경제에 던지는 메시지
류현진에겐 무기가 많다. 심지어 한 가지 무기도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예컨대 류현진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구사되곤 한다. 일부에선 류현진이 5가지 종류의 체인지업을, 5가지 다른 코스에, 5가지 스피드로 던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체인지업 하나만으로도 변화무쌍한 투구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올해 류현진은 다양한 구종이 속도와 코스를 달리하면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타자들을 현혹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올해 상반기 류현진이 현대 야구에서 보기 드문 성적을 올릴 때 타자들은 류현진이 어떤 레퍼토리로 승부를 걸어올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평균자책이 1점대 초반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무기의 다양성은 여러모로 유리할 수 밖에 없다.
한국경제는 한창 성장할 때 반도체, 자동차, 조선·해운, 화학, 기계 등에서 고르게 약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업종에서 중국에 따라 잡히면서 경쟁력을 상실해 갔다.
그나마 반도체로 버티다가 이마저 흔들리자 전체 경제가 활력을 잃어버렸다. 다양한 구종을 지닌 투수가 유리하듯이 한가지 산업에만 집중한 경제는 위험하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이 잘 하는 것을 쉽게 버려선 안 된다. 류현진에게 아무리 다양한 레파토리가 있더라도 체인지업 없는 류현진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실 많은 투수들이 다양한 구종을 습득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주무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종 습득을 포기한다. 장점은 유지한 채 변화를 꾀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경제가 희망을 갖기 위해선 반도체 경쟁력 업그레이드와 다른 업종의 재도약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금 한국경제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이다.
류현진에게 배워야 할 또 다른 점은 끝없는 변화의 중요성이다. 현재 메이저리거 류현진은 한화 이글스 시절의 KBO리거 류현진과는 다른 사람이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류현진이 한국 프로야구의 우수성을 알렸다는 식의 속칭 '국뽕 야구'에 도취되서는 안 된다.
강정호 덕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홈런왕 박병호는 한국 야구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국내에선 50홈런을 치던 강타자였지만, 메이저리그에선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트리플A에서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 실력이었다. 한국 야구는 외국인 선수를 더 받아들여 경쟁구도를 강화해야 한다. 야구팬은 지금보다 더 나은 프로야구 서비스를 원하게 될 것이다.
류현진이 커터를 장착한 뒤 이전과는 다른 선수로 거듭 났듯이 한국경제도 4차 산업혁명에 맞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IoT, 바이오, 로봇산업 등 미래 먹거리 산업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많아져야 한다. 정부는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신기술 기업들의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냉혹한 경쟁을 인정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세계가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판에 한국만 온실같은 온정주의에 안주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 류현진은 혹독한 메이저리그 경쟁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끊임없이 변신해서 살아남았고 결국 정상급 선수가 됐다.
최근 미국 프로야구 트리플A에서 뛰는 한 선수가 자신의 급여를 SNS에 공개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가 1년간 프로선수로 뛰면서 손에 쥐는 연봉이 고작 우리돈 1천만원 정도였던 것이다.
트리플A 내에서도 페이 수준 차이가 크지만, 한국 프로야구(통상 더블A 실력 정도로 평가한다) 선수들은 자신의 실력과 한국에서 받는 대우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글로벌화됐으며, 고객은 언제든 더 나은 서비스를 해주는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글로벌화된 세계경제의 경쟁 시스템은 안주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경쟁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고 탁상행정을 일삼는 공무원이나 더 늘리려 한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 정부가 내세운 '공정경쟁'은 활력을 상실한 한국경제가 절실히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말과 달리 정부의 행동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평가들이 많다.
예컨대 엉망이 된 대학입학 시스템의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정부는 '정시'를 늘리겠다는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실력이 없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메이저리그를 통해 공정경쟁의 가치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한국시간 10일 LA 다저스는 디비전시리즈도 통과하지 못한 채 탈락해 버렸다. 올해는 더 이상 류현진이 마운드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