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민닷컴 장태민 기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전날 추경과 관련한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이자율 시장에선 추경 규모나 적자국채와 관련해 구체적인 '수치'가 나오는 것 아니냐면서 경계감도 나타났다.
인수위는 추경호 기획조정분과 간사가 국회에 일을 보러 가게 되면서 2시 반 발표가 4시 반 정도로 미뤄졌다는 소식도 전했다.
하지만 막상 추 간사의 발표는 '추경 구체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추경 구체화 시점은 오히려 연기됐다.
■ 추경 구체화 시점 연기
추경호 대통령직인수위 기획조정분과 간사는 전날 오후 추경안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했다.
추 간사는 인수위 기간 중 규모, 재원 조달, 내용 등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재원 조달과 관련해 "지출 구조조정, 적자국채 발행 여부, 금융시장과 재정건전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충분히 검토해 실무작업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추경과 관련해 빠르면 현 정부에 추경 요청을 할 수도 있고, 안 들어주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대로 추경안을 국회에 보낼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추 간사는 추경과 관련한 새 정부 독자노선을 선언한 셈이다.
사실 그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2차 추경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홍 부총리가 임기 내 추가 추경에 대해 반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인수위와 협의도 매끄럽지 않았다.
이자율 시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추경 규모와 재원 마련 방법을 확인하기 어렵게 됐다.
■ 민주당 '추경안 취임 후 제출하겠다는 건 황당한 일...인수위 신뢰 못해'
일단 1차 추경 16.9조원을 감안할 때 2차 때는 30조원대의 추경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미래 정부(국민의힘), 민주당, 기재부 입장이 모두 달랐다. 규모와 적자국채 모두 현재로선 예단하기가 어렵게 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그간 2차 추경에 대해 탐탁지 않은 모습이었고 미래 정부와 국민의힘은 '예산안 구조조정'을 강조했다.
민주당은 꼼수 없이 적자국채 발행을 통해 돈을 마련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인수위는 '추경 관련 작업을 인수위에서 하고, 제출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 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민주당 입장에선 당연히 발끈할 수 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민주당은 당선인의 '공약 파기'라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전날 저녁 민주당은 논평은 통해 "윤석열 당선자는 대선 당시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즉시 최대 1천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면서 "그런데 소상공인 자영업자 손실 보상을 위한 50조 추경 역시 변죽만 울리다 취임 이후 제출하겠다니 황당하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특별한 희생을 한 소상공인, 자영업자분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약속드린다던 국민과의 약속은 어디 갔나"라며 "경영상의 어려움과 부채에 짓눌린 자영업자들이 인수위 앞에서 손실보상 약속을 이행하라고 기자회견을 했다"고 했다.
윤석열 당선인이 한시가 급한 소상공인에게 '기다리라'라고만 한다면서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고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는 윤석열 인수위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 국민의힘 '우리는 국가재정 신경 쓴다...문 정부 탓에 우리가 쓸 돈 부족'
여와 야의 추경 재원 마련 프레임이 부딪힌 이유는 국가재정을 둘러싼 다른 시각에서 기인한다.
민주당은 그간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국가 재정이 상당히 건전하다는 데 무게를 두면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왔다.
특히 민주당 내 확대재정 강경파들은 "재정이 오히려 너무 건전해서 문제"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최근 국가 부채가 큰 폭으로 늘면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야당은 이런 목소리를 상당부분 대변해야 했다.
다만 당선인이 통 큰 소상공인 지원을 공약한 상황이어서 재정건전성을 감안한 추경 재원 마련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나라 빚' 책임론을 내세우면서 민주당을 압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날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5년간 역대급 세수 호황을 누리는 중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국가부채를 무려 400조원이나 늘려놓았다"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잘못된 경제정책을 고집하고 탈원전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등 무능과 아집의 결과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전기요금 인상 같은 정권에 불리한 이슈들을 대선 이후로 최대한 미뤄두면서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둘 인상 보따리를 푸는 모습을 보인다"면서 "새 정권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려는 치졸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일갈했다.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 이후 한전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사실이다. 문 정부 출범 첫 해 109조원이던 부채는 작년 말 146조원으로 대폭 늘었다.
정미경 최고위원은 "문재인 정부는 매년 100조원씩 빚을 내서 국가부채 1천조원 시대를 만들었다"며 "그 부작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세금으로 땜빵 처리하면서 국민을 지속적으로 속였다. 그들 중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 특위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토론회 열고는 소주성 파이팅을 외쳤다고 한다"고 비난했다.
유의동 정책위의장은 민주당 정권 재정정책의 폐해가 고스란히 윤석열 정부로 이전되고 있다면서 우려했다. 문재인 정부의 과도한 재정정책 탓에 새 정부가 쓸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유 의장은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가 의결한 예산안 편성 지침은 한마디로 우리는 나랏돈을 흥청망청 평펑 썼는데 이제 곳간이 비었으니 차기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알뜰 살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첫 예산이 될 내년도 예산안 편성을 앞두고 고강도 지출 구조조정을 예고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에 무책임하고 방만했던 재정정책을 되돌아볼 때 만시지탄을 금할 수가 없다"면서 "나라 곳간이 비었는데도 초과세수 운운하면서 선거 앞두고 무차별하게 현금을 살포하더니 차기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1천조원 넘는 국가부채를 떠넘기며 지속가능한 재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후안무치 뻔뻔함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 추경안, 4월 제출 가능성 완전히 제거된 것일까
전날 인수위 추경호 간사가 추경안을 새 정부 출범 후 제출한다고 했지만 민주당은 4월 국회에서 심의하자는 입장이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인수위는 4월 국회에서부터 심의할 수 있도록 현실 가능한 추경안을 제출해 대선 때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민주당은 그러나 예산안에 크게 손을 대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정부 재량재출 예산이 200조원 수준인 상황에서 대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은 사실상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박 원내대표는 "당선인은 국채발행은 불가하고 지출 구조조정만으로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한다"면서 "50조원은 정부 재량지출 예산의 1/4에 해당하는 대규모로, 아무리 예산의 군살을 뺀다고 해도 불가능한 수치"라고 했다.
인수위가 말하는 재원 마련 방식은 예산안 다이어트 정도가 아니라 예산안의 몸통을 자르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재정은 아직 충분한 여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적자국채를 찍어서 현금 지원을 하자는 입장엔 변함에 없다.
한편 인수위가 '조속한' 추경안과 관련해 완전히 문을 닫아둔 것은 아니다. 인수위가 전날 새정부 출범 후 추경안 제출을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민주당의 협조를 촉구하면서 가능성도 약간 열어뒀다.
김은혜 대변인은 이날 "추경안은 1분1초가 급한 국민들을 위해서도 민주당과 협조를 바란다"면서 "기재부와 원활하게 협의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