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주요국 물가 상승률이 30년, 40년만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인플레 압력이 지속된 가운데 독일의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7%에 달해 예상(8.1%)과 전달 수치(7.8%)를 상회했다. 이는 48년래 가장 큰 상승률이었다.
독일의 물가 급등은 에너지와 식품가격 때문이었다.
러-우 전쟁 여파로 원유 등 에너지 가격과 농산물 가격이 크게 뛰면서 독일도 직격탄을 맞은 모습이다. 5월 소비자물가가 대폭 오른 이유는 에너지 가격이 38.3%, 식품 가격이 11.1% 뛰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리 인상폭을 둘러싼 논란도 커졌다.
■ 독일 물가 급등에 '빅스텝' 논란 이어지는 ECB
독일의 물가 급등이 공급요인에 기인한 것이지만 9%에 가까운 물가 상승률은 기준금리 50bp 인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유로존 맹주국의 물가 급등은 ECB의 통화긴축 강화 주장으로 이어졌으며, 시장도 이를 의식하고 있다.
단기자금시장에선 ECB가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100bp를 훌쩍 넘는 인상폭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으며, 7월이나 9월에 빅스텝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진단들도 이어졌다.
독일의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확장적 재정정책 종료를 지지한다. 인플레 억제가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들이 모여 있는 ECB에선 각국 사정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단 7월 금리인상이 대세로 부상한 가운데 금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올려야 할지를 놓고 입장차가 나타나는 것이다.
필립 레인 ECB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0일 "7월과 9월 25bp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레인의 발언엔 빅스텝 주장에 대항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다.
국제금융센터는 "레인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역내 인플레이션이 5월에 정점을 기록하고 이후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기에 금리인상은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번 발언은 일부에서 제기되는 50bp 인상 주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 대략 정리된 미국의 금리인상폭 vs 논란 중인 유로존 금리인상폭...그리고 독일 시장금리
미국에선 연준이 6월과 7월 기준금리를 50bp씩 인상할 것이란 전망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지금으로선 두 차례의 추가적인 50bp 인상 뒤 빅스텝에 따른 영향을 점검하면서 다시 연말까지 베이비 스텝을 밟을 것이란 예상이 강하다.
이런 스텝을 밟으면 연말 미국의 기준금리는 2.5~2.75%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유로존에선 빅스텝, 베이비스텝 논란이 진행 중이며, 시장금리는 예상보다 높은 인플레 압력에 놀란 상태다.
30일 독일 국채10년물 금리는 9.25bp 급등한 1.0520%를 기록했다. 이 금리 레벨은 5월 6일(1.130%)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독일 금리는 올해 3월 7일을 끝으로 마이너스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10년물 금리는 -0.0197%를 기록했으며, 그 때부터 3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10년물 금리는 100bp 넘게 뛰었다.
독일 2년물 금리는 10.75bp 상승한 0.4407%를 기록했다. 이 수준의 금리를 찾기 위해선 2011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 러-우 전쟁 여파에 유로존 경제와 물가 관리 어려움 직면
유로존은 코로나19 리오프닝에 따라 서비스업과 관광업의 개선이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비용 부담이 크게 늘어나면서 제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역시 크다. 유로존은 러-우 전쟁에 따른 경기·물가 영향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제 권역이다.
특히 독일은 이 지역 제조업 등 주요 산업을 이끄는 유로존의 맹주다. 독일은 러-우 전쟁에 따라 경기와 물가 모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포지션이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유럽 내에서 대표적으로 제조업을 영위하는 독일과 이탈리아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가격과 러시아산 에너지 수급상황에 특히 민감하다"며 "유로존 스스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거나 러시아가 수출을 중단할 경우 이들 국가의 리세션이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유로존은 또 최근 물가 급등 과정에서 에너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다른 경제권역보다 공급 측 인플레로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하지만 물가상승률 수치 자체가 9%에 근접하면서 '공급 요인'에 따른 물가 압력이라고 폄하하기도 어려운 일이 됐다.
■ 한국은 일단 빅스텝 가능성 낮지만...
지난해 상반기엔 2분기가 글로벌 물가 고점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강했다.
하지만 공급망 문제, 원자재 가격 급등 등으로 물가 고점에 대한 기대감은 지속적으로 이연됐다.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물가가 고점을 찾아 헤매고 있다. 다만 최근엔 미국 물가 상승률이 다소 둔화되면서 '피크아웃'에 대한 신뢰도도 올라갔다.
하지만 추가적인 확신이 필요한 상황이며, 고점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상당기간 고물가 기간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한국과 미국, 유럽 등 상당수 국가들에게 있어서 물가안정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일 정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신문에 물가관리의 중요성을 기고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31일 파월과 회동하는 바이든은 "연준이 고물가 잡기에 나서면서 일자리 증가세가 월별로 50만명에서 15만명 수준까지 둔화했다"면서도 "미국이 빠른 회복세에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으로 전환하는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를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은 지금 연준이 인플레를 낮추는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면서 '고물가에 대응하면서 안정적 성장을 하는 것'이 과제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물가가 조만간 피크아웃을 하더라도 한국을 포함해 주요국이 물가 관리목표로 삼는 2%와는 괴리가 큰 물가 상승률이 상당기간 이어질 수 밖에 없어 계속해서 정책금리를 올려줘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에선 빅스텝이 단행되기 위해선 물가 상승률이 좀더 올라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A 증권사의 한 딜러는 "지난 금통위에서 이창용 총재가 확실히 금리인상 필요성을 강조하자 일부에선 50bp 인상 가능성을 거론했다"면서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기대한다기 보다 '혹시 모른다'는 차원이었다. 한국의 경우 빅스텝을 위해선 6%대 이상의 CPI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주요국의 정책이나 글로벌 인플레 압력에 대한 부담은 이어지고 있다.
B 증권사 딜러는 "최근 유로존 금리인상 시점이 7월로 당겨진 데서 더 나아가 50bp 인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면서 "여기에 바이든까지 나서서 물가 관리를 강조하니 국내 이자율 시장도 주눅이 드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한편 이날 아시아 시장에서 미국채10년물 금리는 2.8%대 중반을 향해 10bp 가까이 오르면서 국내 시장을 압박했다. 호주 10년물 금리는 장중 10bp 넘는 급등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