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민닷컴 장태민 기자] 한국은행이 오늘부터 내일까지 '변화하는 중앙은행의 역할: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The Changing Role of Central Banks: What Can We Do and What Should We Do?) 라는 주제로 2022년 BOK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경제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중앙은행의 새로운 역할 등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개회사를 통해 "지금 우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중앙은행의 역할이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음을 깨닫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확장적 재정정책과 더불어 저금리 및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쌓인 수요압력에다 팬데믹과 전쟁으로 인한 공급병목 현상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1970년대와 같은 높은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 한은 총재의 2가지 자문자답
이창용 총재는 한은 국제컨퍼런스 개회사를 통해 중앙은행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지금의 경제상황이 중앙은행에게 있어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즉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처럼 물가안정이라는 기본 역할에만 집중하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두 번째는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진정됐을 때 코로나 위기 이전과 같은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다시 올 것인지, 그리고 온다면 지난 10여 년간 사용한 통화정책을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지, 아니면 최근의 예상치 못한 높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해 이를 보완하거나 새로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주요 논제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혁신이나 기후변화 대응의 관점에서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들 이슈에 대한 대응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며, 앞으로 이를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현재 각국 중앙은행도 이러한 인식 하에 CBDC 도입을 추진 중이거나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으며, 녹색성장을 위해서도 정책수단의 개발과 이행을 구체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앙은행의 사회적 책임 또한 그 요구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총재는 "팬데믹의 충격과 그로부터의 회복이 계층별·부문별로 불균등(uneven)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며 "이런 양극화 현상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 10여 년간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 활용과 이 과정에서 나타난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부정적 인식 속에, 중앙은행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려 한다 하더라도, 소득 양극화와 부문간 비대칭적 경제충격의 문제들을 과연 통화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 질문인 이번 인플레이션이 진정됐을 때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의 흐름이 다시 나타날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전에 활용했던 정책들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이 총재는 다만 "선진국을 위시하여 한국, 태국, 그리고 어쩌면 중국 등 인구고령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일부 신흥국에게 있어 저물가와 저성장 환경이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폴 크루그먼 교수가 선진국 중앙은행에게 조언한 것처럼, 한국이나 여타 신흥국들도 '무책임할 정도로 확실하게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credibly promise to be irresponsible)'해야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지난 10여 년간 중앙은행의 실제 자산규모 변화를 보면 신흥국의 경우 그러한 사치를 누릴 여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G7 국가의 중앙은행 자산규모는 2007∼2020년 중 GDP 대비 3.8%에서 31.0%로 크게 늘어났으나 신흥국의 경우 4.0%에서 6.2%로-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기는 하나-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증가에 그쳤다고 했다.
이는 무엇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의 경기부진 정도가 선진국에 비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나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는 점도 신흥국 입장에서 재정이나 통화정책을 마냥 확장적으로 운용할 수 없었던 주요 제약요인이었다고 했다.
선진국과 같은 비전통적 정책수단 활용은 자칫 통화가치 절하 기대로 이어져 자본유출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신흥국의 경우 인플레이션 기대 안착에 있어서도 선진국에 비해 신뢰성의 제약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따라서 신흥국은 통화정책 운용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그 결과로 과거 평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선진국이 직면하고 있는 고인플레이션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게 되었지만 이를 다행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신흥국의 경우 선진국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장적 재정·통화정책과 더불어 일부 국가에서는 그간 터부시되어온 국채 직접 인수에까지 나섰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심각한 환율 절하나 자본 유출이 초래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신흥국의 자산매입 등 비전통적 정책수단들이 금융위기나 코로나 위기 등 글로벌 공통충격에 대한 전세계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한 가운데 선진국에서 훨씬 더 큰 규모의 자산매입에 나섬으로써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흥국에 대한 불이익은 크지 않을 수 있었다는 평가다.
총재는 그러나 향후 개별 신흥국이 구조적 저성장 위험에 직면해 홀로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사용할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타날지는 의문스럽다고 했다.
이 총재는 "대규모의 글로벌 유동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코로나 위기 극복 과정에서와 비슷한 수준의 확장적 정책이 다시 이뤄진다면 환율과 자본 흐름 및 인플레이션 기대에 미치는 함의는 사뭇 다를 것"이라고 했다.
자국의 저물가·저성장 국면에 대비한 신흥국만의 효과적인 비전통적 정책수단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찾기 쉽지 않으며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번 한은 컨퍼런스 자리는 양적완화가 기간 프리미엄 등을 통해 금융시장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신흥국의 경우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외환시장 개입이나 자본통제 등의 다른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 활용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신현송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까지는 안 간다. 금리인상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이창용 한은 총재가 중앙은행의 변화하는 역할에 대해 고민을 드러낸 가운데 회의 참석자들은 논문 발표 등을 통해 각자의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가운데 오랜기간 이창용 총재와 함께 한국은행 총재 후보로 많이 거론됐던 '해외파'인 신현송 BIS 조사국장은 우선 최근의 높은 원자재 가격 급등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신 국장은 "최근 원자재 가격의 가파른 상승과 높은 변동성이 경제성장을 제약하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겠으나 세계 경제의 원유 의존도 감소와 견고한 정책체제 등을 감안할 때 1970년대의 극심했던 스태그플레이션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신 국장은 그러면서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최근 높아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정책 정상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세계 경제의 원유 의존도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에너지 사용량 중 원유 비중이 1970년대말 약 50%에서 2020년 30% 수준까지 하락한 반면 재생에너지 비중은 6%에서 16%로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플레를 빨리 제어하는 게 급선무라고 조언했다.
신 국장은 "향후 정책 정상화를 통해 경제를 연착륙 시킬 수 있을 것인가는 가계나 기업이 인플레이션을 의사결정에 반영하기 전에 인플레이션을 얼마나 빠르게 이전의 낮은 수준으로 회복(restoring low inflation quickly) 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 '신흥국 국채로 안전자산 만들자는 아이디어' 눈길
선진국의 금리인상에 따른 신흥국 자본유출 가능성이나 국제금융시장 불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신흥국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안전자산을 늘려야 한다는 논문도 발표돼 관심을 끌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Markus K. Brunnermeier 교수는 "국제금융시장은 안전자산 선호 현상 발생 시 급격한 자본유입 중단(sudden stop) 및 국가 간 대규모 자본이동 등으로 불안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며 "이는 소수 선진국에 의해서만 안전자산이 공급되는 현재 국제금융시장의 구조에 기인하고 특히 신흥국의 경우 이 현상으로 선진국으로의 급격한 자본이동, 통화가치 절하 등이 발생해 위기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 통화 시스템, 신흥국의 기존 정책은 주로 자본유출에 대한 대응수단(IMF의 대출 제도(lending facility), 중앙은행 간 스왑라인 협약)을 마련하거나 외환보유고를 확충하는 방식(buffer approach)이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신흥국·개도국(EMDE)의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글로벌 안전자산 채권(Global Safe Bond, GloSBies)을 발행해 안전자산 공급을 다변화하자"고 제안했다.
국제 특수목적기구(SPV)가 신흥국·개도국 발행 국채를 매입해 집합화(pooling)하고 상환 우선순위에 따라 선순위채(senior bond), 후순위채(junior bond)로 트란셰(tranche)를 분류한 후 선순위채에 GloSBie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고 했다.
후순위채 트란셰는 손실을 흡수하고 선순위채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므로 후순위채 트란셰가 충분히 확보되는 경우 선순위채의 손실 가능성이 매우 낮아 선순위채를 안전자산으로 분류 가능하다고 했다.
경제위기 발생 시 개별 국가 발행 채권이 안전자산의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선순위채(senior bond)는 안전자산의 지위 유지가 가능하여 신흥국이 발행하는 안전자산의 규모와 질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소개했다.
Brunnermeier 교수는 "GloSBies 발행으로 기존 선진국 위주의 비대칭적인 안전자산 공급이 다변화되면서 안전자산 선호 현상 발생 시 나타나는 선진국으로의 자본쏠림을 막고 신흥국에 일정 정도 머물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본이동의 다변화는 개별 국가 및 국제금융 시스템의 복원력 향상에 기여하는 가운데 낮은 비용, 자체 안정화 기능 측면 등에서도 강점이 있다"고 했다.
특히 국가부도 리스크 증가→국채가격 하락→은행 손실 확대→정부의 은행 구제금융 가능성 증가→국채가격 추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국가 및 은행 리스크의 악순환(diabolic loop)에서도 탈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