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민닷컴 장태민 기자]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639조원 규모로 제시했지만 여야 갈등으로 예산안 처리는 법정 시한을 넘겼다.
우리 헌법은 회계연도 개시일(1월1일) 30일전에 예산안을 확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헌법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한다.
헌법이 회계연도 개시일 30일 전에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확정짓도록 한 이유는 예산안을 바탕으로 예산배정과 집행계획을 세우도록 돕는다는 차원이다.
예산안은 법정 처리 기한인 2일을 넘겼으며, 이제 이달 9일까지인 정기국회 회기 내에 처리해야 한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8~9일 양일간 본회의를 열어 예산안을 처리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 민주당 "이상민 사퇴문제 해결 후 예산안 처리"
민주당은 계속해서 표면적으로는 예산안 심사 원칙을 문제 삼고 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5일 "민주당은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초부자 감세 철회, 위법 시행령과 낭비성 예산 감액, 따뜻한 민생예산 확충이라는 세 가지 심사 원칙을 거듭 밝혀왔다"며 "우리 당의 이런 합당한 요구를 여당이 적극 수용한다면 당장이라도 예산안을 처리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정부와 국민의힘은 무책임하게 '준예산'을 운운하며 시간끌기로 예산안조정소위의 심사를 거부하고 본회의도 무산시킨 사상 초유의 일을 저질렀다"며 "원내1당의 합당한 주장을 국정 발목잡기로만 몰아가면서 정부의 잘못된 예산안마저 무조건 통과만 시키려는 국민의힘의 태도는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예산 심의권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요일인 전날 여와 야 정책위의장과 예결위 간사가 만나 쟁점을 협의한 바 있으며, 오늘도 협의는 이어가는 중이다. 두 당은 '2+2 협의체'에서 일단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민주당은 '이상민 사퇴'에 대한 완고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자진사퇴를 거부한다면 법률에 근거한 어떤 방식으로건 장관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당의 '준예산'에 맞선 '수정 단독처리' 카드까지 거론했다.
민주당은 8일 본회의 이전에 의원 총회를 열어 이상민 장관의 문책 방식으로 정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해임건의안 처리 후 거부시 탄핵 절차 도입' 방안과 '곧바로 탄핵안 발의' 방안을 놓고 당내 의견을 모을 예정이다.
박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예산안을 합의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부와 여당이 '윤심'만 바라보며 끝내 예산안 협상에 성의 없이 계속 무책임하게 나온다면, 정기국회 내 처리를 위해 단독 수정안 제출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민주당은 일단 예산안 늑장 처리사태의 책임을 '이상민 장관 사퇴' 문제와 결부시키기고 있다.
오영환 원내대변인은 "예산안이 국회선진화법 이후 최장 지각 처리될 처지에 놓였다. 국민의힘은 나라살림과 민생 예산보다 이상민 장관 지키기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며 "국민의힘은 주말에 이어진 예산안 협의에서도 무조건 반대와 거부만 외쳤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당이 외면한다면 예산은 누구에게 책임지라는 것인가. 어려운 민생경제 상황 속에 국민의 속 타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집권여당으로서 예산 협의에 적극적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 여당 "야당이 국정운영 발목잡기 위해 '이재명 표' 예산 밀어넣어"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국민의 삶과 직결된 내년도 예산안과 민생 법안의 우선적 처리를 힘으로 내팽개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정부와 여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국정운영을 위한 핵심 예산을 잘라내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민의힘은 거대 야당이 국정 발목을 잡기 위해 예산안을 칼질하는 동시에 '이재명 표' 예산을 밀어넣으려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하 대변인은 5일 "공공분양주택, 소형모듈원자로 개발 사업 등 새 정부의 국정 핵심 과제에 필요한 예산은 모두 잘려 나갔다"면서 "종부세, 금투세 등 세법 개정안 심사도 여전히 꽉 막혀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이런 와중에 난데없이 '이재명표 예산'이라는 것을 들고 와 또 하나의 국정 마비 협박용 카드로 들이밀고 있다"고 분개했다.
야당이 예산안뿐 아니라 각종 쟁점 법안도 모조리 끌고 와 국회를 지저분한 참호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했다.
박 대변인은 "방송법, 노란봉투법, 안전운임제법 등 여야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법도 일방, 강제, 꼼수 처리하며 폭거를 자행했다"며 "민주당이 정치를 짓밟으니 그 고통은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변인은 "아동수당, 기초연금, 의료급여 등 예산안 처리가 늦어짐에 따라 위기가정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종부세 특별공제가 무산되면서 국민 120만명에게 폭탄 고지서가 날아들었다"고 했다.
아울러 이상민 행안부 장관 문책 문제를 내세워 국회를 멈춰 세웠다고 비판했다.
양금희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은 민생과 직결된 정부 예산안까지 볼모로 삼아 조악한 정치공세를 계속하고 있다"며 "그 같은 정치공세를 통해 '대화와 타협'이라는 명목의 '플리바게닝'을 시도할 목적이라면 일찌감치 접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양 대변인은 "당 대표 한 사람의 이기심과 제1야당의 집단 광기가 국가의 민생, 경제를 통째로 뒤흔드는 작금의 세태는 대한민국의 오점으로 기록돼 준엄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예산안, '야당 수정안 단독처리' VS '준예산'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비리 의혹 조사 등으로 여야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예산안은 제대로된 심사도 거치지 못하고 있다.
검찰이 정진상·김용 등 이재명 대표의 측근들을 구속하자 민주당은 검찰의 칼끝이 이재명 대표를 향해 다가온다고 보고 결사 옹위하는 중이다.
최근 민주당 내 분열 조짐도 나타났던 가운데 이날 야당 지도부에선 이재명 당 대표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정청래 민주당 최고위원은 최고위원회에서 "이재명 당대표에 대한 전방위적 탄압에 맞서 싸울 것"이라며 "이재명 당대표를 지키는 일이 당을 지키는 일이고 당원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재명 당 대표의 정치 공동체로서 우리 모두 이재명 대표의 동지가 돼야 할 것"이라며 "동지란 이겨도 함께 이기고 져도 함께 지는 것이며, 비가 오면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고 했다.
민주당은 정국 돌파를 위해 행안부 장관을 도려내는 일을 급선무로 보고 있다. 야당은 일단 이태원 참사 책임을 물어 윤석열 대통령의 측근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 해임건의안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야당은 국회 의석수를 내세워 정부가 중점을 두는 예산을 삭감하고 자신들의 의중을 관찰시킨 야당 수정안 단독 처리까지 거론하고 있다.
반면 여당은 연내 예산안 처리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준예산을 운운하고 있다. 준예산은 전년도 예산에 준해서 편성하는 예산이다.
한국은 여야 정치갈등이 심한 구도이다보니 예산안 늑장 처리가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측면도 있다.
지난 2013년 예산의 경우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1월 1일 새벽에 처리하기도 했다. 이런 사태에 대한 반성으로 2014년엔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해 법정 처리 시한이 지나면 정부 예산안 원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도록 했다.
그런 후에도 한국 예산의 '법정 시한 넘기기'가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2020년 예산은 법정 처리시한 2일보다 8일 늦은 10일에 처리되기도 해 한국 국회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 금융시장, 예산안 늑장 처리 '특별한 일' 아니다...각종 법안 처리 지연도 관심
여야 정치 갈등이 고조되면서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지만 금융시장에선 '통상적인' 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여와 야가 핏대를 올리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산안 규모가 지금 와서 크게 바뀌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A 증권사의 한 채권딜러는 "한국 정치가 법을 지키지 않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번 예산안 처리 지연 역시 통상적인 과정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 정권 교체 후 여소야대 국면에서 사실상 법안들이 처리되지 못하면서 금투세, 종부세 등 경제관련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해 금융시장, 국가경제 등에 미칠 영향을 주목하기도 한다.
현재 종부세, 금투세, 법인세 등 세법 개정안 심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태이며, 야당은 파업중인 민주노총 화물연대와 연대하고 있다.
아울러 여소야대 상황에서 워낙 여야 갈등이 심하다 보니 윤석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취임 6개월 동안 한 건도 처리되지 못했다.
B 증권사 관계자는 "검찰과 여당은 대장동 사건으로 이재명 대표를 구속하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야당은 야당대로 일단 이를 저지하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로 보인다"며 "역대 어느 때보다 정치권 싸움이 치열하다보니, 과연 경제 관련 법안들이 제 때 처리돼 새로운 2023년을 맞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했다.